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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학 공부 12

by 희환호호 202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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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파동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과열 투기 현상이다. 사실상 최초의 거품 경제 현상으로 인정되고 있다. 당시의 네덜란드는 황금시대였고, 네덜란드의 튤립 구근이 너무 높은 계약 가격으로 팔리다가 급락했다. 튤립의 가격은 그 당시 숙련된 장인이 버는 금액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팔렸다. 튤립 파동은 역사상 처음으로 기록된 투기로 인한 거품이었다. 튤립파동이란 용어는 자산 가격이 비상식적으로 높을 때 은유적으로 자주 사용된다.

당시의 네덜란드에서는 터키 원산의 튤립이 큰 인기를 끌었고, 튤립에 대한 사재기까지 벌어졌다. 꽃이 피지도 않았는데 피는 시기에 가격을 책정하여 거래되는 선물거래까지 등장했다. 1630년대 중반에는 뿌리 하나가 1억을 넘어가는 가격까지 치솟았다. 그러다 하락세로 가격이 내려가자 상인들은 빈털터리가 되었고 귀족들은 소유하던 영지까지 담보로 잡혀야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네덜란드는 영국에게 경제 대국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튤립은 단기간에 수확할 수 없는 품종이기 때문에 공급이 한정되어 품귀현상을 일으켜 가격을 상승시켰다.

1610년대 최초로 튤립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품종개량을 거쳐 다양한 튤립이 생겨났다. 투기자들이 튤립의 인기에 주목한 것은 1634년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튤립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않고 가격상승을 목적으로 시장에 진입하였다.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로 튤 논란이 퍼지게 되고, 수요 증가로 구근 판매가 활성화되었다. 그중에는 돈을 많이 번 사람도 있었다. 고급 품종 구근 하나로 집이 거래되기도 했다. 이렇게 단기간에 큰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게 사람들에게 퍼지자 시장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증가했고, 이렇게 수요가 증가하게 되어 가격이 상승하였다.

이러한 거래는 아무 곳에서나 이루어졌고 선물로 계약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선물거래가 되자 누가 어디서 구매했는지조차 정확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도 생겼다. 하지만 일반품종에 대해선 식물애호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거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1637년경 튤립 거래가 갑자기 폭락했다. 가격이 내려간 것이 아니라 구매자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어음은 부도가 났고, 지급을 할 수 없는 채무를 가진 사람이 3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다툼이 일어나고 도망가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소송을 건 사람들도 있었지만, 해결에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이런 혼란 사태가 일어나자 국가에서 개입하기 시작했고, 채권자 채무자의 로비 전쟁 끝에 거래를 보류하는 결정이 내려진다. 계약서의 내용들은 모두 무효가 되었고, 소수의 파산자와 벼락부자를 남긴 채 튤립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튤립 버블은 네덜란드 경제와 그 역사에 거의 영향을 남기지 않았다. 식물 애호가들은 비싼 튤립을 계속 요구했고, 다른 산업이 타격을 받았다는 사료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튤립을 거래했던 사람들에 대한 비판도 일어났고, 이후 일시적으로 네덜란드 사람들은 튤립을 싫어하게 됬다. 이러한 내용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교훈처럼 구전되었다. 이후 튤립 버블은 희화에 소재로 그려졌지만 연구한 것은 거의 없었다. 1841년에 세계에 알려졌고, 현대에 들어서는 튤립 버블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남해회사는 근세에서 근대 유럽에서 만들어진 특권 회사의 하나이다. 아프리카의 노예를 서인도 제도에 수송하고 이익을 얻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1711년 영국에서 설립된 특권 회사를 말한다. 이후 1720년경 남해회사 거품 사태를 일으키게 된다.

당시 남해회사는 위기에 빠진 영국의 재정을 살리고자 설립되었다. 영국의 재정 상황은 당시에 매우 안 좋았고, 이것을 우려한 당국이 공공 부채를 정리하기 위해 설립했다. 부실 상태였던 많은 채권과 증권의 일부를 강제로 남해회사 주식으로 전환해 국고 지원과 남해 무역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고 이자 지급 등을 해서 채무를 정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이후 남해 무역은 스페인과 협상을 통해 아시엔토 무역권, 즉 아프리카 스페인 서인도 간의 노예무역의 권리를 행사하며 이윤을 창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무역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시험적으로 도입했던 복권 채권이 성공을 거두자 금융 회사의 색을 가지가 된다. 노예무역이 잘 안됬던 건 스페인의 무역량을 영국이 채우지 못했고 스페인과 전쟁이 시작되어 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주된 이유이다.

1719년 남해회사는 거액의 채권 인수 대가로 액면가에 해당하는 남해 회사 주식을 발행하는 권한을 은행과 경쟁 끝에 차지하게 된다. 이것이 남해 계획이다.

그러나 남해 계획은 처음부터 안 될 사업이었다. 은행과의 경쟁 속에서 엄청난 상납금이 있어서 위험부담이 큰 한방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해 회사에서 준비한 계획은 주식과 국채 교환은 시가로 한다. 그러나 발행 허용 수량은 교환 금액에 따라 하기 때문에 액면 200파운드분의 주식을 발행할 수 있다. 이것을 매물로 내놓으면, 매출 200파운드는 그대로 남해 회사의 이익이 된다. 위의 방법으로 남해 회사의 이익이 올라가면 당연히 주가가 상승한다. 이것을 계속 반복하면서 주가는 무한 상승하고, 남해 회사의 이익을 얻고 보유자는 순식간에 부자가 되는 것이 남해 계획이었다.

당시에 투자처를 찾고 있던 영국의 중산층들의 자금은 시장의 자금이 출렁일 정도였다. 이런 영향으로 남해 회사의 주가는 빠르게 성장을 했다. 본업은 거의 실행되지 않았지만 남해 회사는 부채 인수 회사로 성장하여 몇 개월 만에 주가가 10배나 상승했다. 영국의 모든 계층을 불문하고 주식에 잘 모르는 사람들도 투기 열풍에 휩쓸려 투기 광풍이 일어났다.

이러한 유행으로 당시 허가제였던 주식회사 설립도 무허가로 만들어졌다. 이른바 암거래를 통한 회사들의 주가도 단번에 상승하게 된다.

이렇게 주가는 급격하게 상승하게 되고 100파운드였던 주식 가격은 700파운드가 되었고 최고치인 1050파운드로 크게 올랐다. 이렇게 급격하게 상승하자 은행과 영국 동인도 회사 등의 주가도 덩달아 상승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주식이 상승하다 보니 무분별하게 회사가 난립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자 정부에서 규제에 나서기 시작했다. 정부의 규제에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거품이 상당했던 주식들은 진정에 그치지 않고 모든 주가가 폭락하는 위기에 빠졌다.

버블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상승도 급격했고 하락도 급격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주가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고, 많은 사람이 파산해 삶을 포기했다. 버블에 놀아난 투자자들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투자자들은 남해 주식회사와 주식을 뇌물로 받았던 정치가에게 화살을 돌렸다. 당시의 정권은 붕괴하여 경제 위기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파국을 맞았다.

이에 책임 추궁당하자, 정부, 왕실의 인사들이 관여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돼 책임을 추궁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을 해결한 사람은 로버트 월폴이었다. 1721년까지 남해 거품 사건의 처리 방침을 확정했고, 다시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어느 곳에서든 정치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느슨하게 조사 되었다. 로버트 월폴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엄격하게 추궁은 하지 못했다. 월폴은 이러한 업적들로 경제 수장이 되었고, 영국의 의원 내각제의 기초를 쌓아 올리게 된다.

그리고 찰리스넬은 남해회사의 회계 기록을 자세히 알고 있는 간부를 추궁하여 장부를 조사하게 되고,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세계 최초의 회계 감사 보고서가 되었다. 이렇게 공인회계사 제도와 회계감사 제도를 탄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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